잡담/소설

노변의 피크닉

mad wand 2023. 9. 10. 19:35

스투르가츠키 형제 공저

380p

16800원

 

 

나는 무언가에 대한 첫인상으로 그것을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취향에 안맞는다고 생각해서 포기를 하거나, 지속적으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죽은 등산가의 호텔로 처음 접했었는데, 후반부의 막나가는 전개 때문에 대단히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이 많이 읽히는 데는 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노변의 피크닉을 읽어 봤는데...

 

...죽은 등산가의 호텔을 쓴 사람들과 동일인이 맞는건지 의심될 정도로, 장르/분위기/완성도 면에서 차이가 났다.

 

 


 

 

작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퍼스트 컨택트에 대한 인물들의 의견 교환 부분이다.

 

"솔직히, 나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 방문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여러 단계를 단숨에 건너띌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을 지닌 특별한 사건이었지. 기술의 미래로 떠나는 여행이랄까. 그러니까, 현대의 양자발전기가 아이작 뉴턴의 연구실에 떨어지면 어땠을까 같은..."

 

"뉴턴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겠죠."

 

"그럴리가요! 뉴턴은 통찰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요? 뭐, 신이 된 그 사람, 뉴턴과 함께 하시길. 그런데 어쨌든 박사님은 방문을 어떻게 생각하시죠?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좋아요, 말해 드리지. 다만 리처드, 당신의 질문이 외계인학이라는 유사과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선 말해 둬야겠습니다. 외계인학이란 공상과학과 형식적 논리를 부자연스레 섞어 놓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 그 연구법의 근본에 있으니."

 

"그게 왜 잘못된 거죠?"

 

"언젠가 생물학자들이 인간 심리를 동물에게 대입하려 했을 때 이미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동물이었는데도"

 

"잠시만요.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요. 우리는 이성을 지닌 생명체의 심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성이란 게 도대체 뭔지 알았더라면 아주 좋았겠지요."

 

"그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누넌은 놀랐다.

 

"당연히 모르지요. 대개는 아주 평면적인 정의만을 얘기합니다. 이성은 인간의 행동을 동물의 행동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의는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서도 말을 못할 뿐인 개와 그 개의 주인을 구분 짓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면적인 정의에서 좀 더 예리한 고찰이 파생하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활동에 대한 우울한 관찰에 기반 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성이란 살아있는 생명체가 비합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러네요, 우리 이야기네요." 누넌이 동의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혹은, 이런 가설적 정의도 있어요. 이성이란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복잡한 본능이다. 요컨대 본능적 행위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다는 얘기지요. 백만 년이 흐르면 본능이 완성될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성과는 분명 불가분인 실수란 것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 우주에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감사하게도 우리 인류는 멸망할 테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때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 즉, 엄격한 프로그램으로 검토된 선택지 외에 다양한 선택지를 시험해 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피크닉 말입니다. 숲, 시골길, 풀밭을 떠올려 봐요. 차가 시골길에서 풀밭으로 들어가고, 차에서 젊은이들이 내리고, 술병들, 음식이 담긴 바구니들, 아가씨들, 트랜지스터 라디오, 카메라들이 나옵니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텐트가 세워지고 음악이 흐르지요. 그러다 아침이 되면 이들은 떠납니다. 밤새 공포에 벌벌 떨며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던 동물과 새, 벌레들이 자기 피난처에서 기어 나옵니다. 그때 이들이 보게 되는 건 뭐겠습니까? 풀밭에는 자동차 엔진오일이 흐르고, 벤진으로 흥건하며 쓸모없는 양초와 오일 필터가 사방에 버려져 있겠지요. 헌 옷이 널브러져 있고, 수명을 다한 전구가 뒹굴고 누군가는 렌치를 버리고 갔고.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겠는 늪지에는 타이어 자국이 새겨졌고...그러니까, 불 피운 흔적이며 사과 찌꺼기, 사탕 껍질, 통조림 캔, 빈병, 누군가의 손수건, 누군가의 주머니칼, 오래되어 찢어진 신문, 동전들, 다른 들판에서 온 시든 꽃 같은 것들을..."

 

"압니다. 노변의 피크닉이죠." 누넌이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우주의 노변에서 열린 피크닉. 그런데 당신은 그들이 돌아올지 아닐지를 나에게 묻는군요."

 

-하략-


 

 

노변의 피크닉은 게임 S.T.A.L.K.E.R 시리즈의 원작이기도 하다. 나는 2016년에 섀도 오브 체르노빌을 해봤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특유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죽어버리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떠오른다.

 

필드 곳곳에 펼쳐지는 괴기현상, 심심하면 삑삑 거리는 가이거 계수기, 내 목숨을 위협하는 npc들

분위기만 봤을 때는 꽤나 독특해서 흥미로웠지만, 하고 싶지 않은(...) 퀘스트들, 어째선지 지속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는 없었다. 

 

 

비록 게임은 엔딩을 보지 못했지만, 그때의 플레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스트루가츠키 형제를 알게 되었고, 노변의 피크닉도 읽게 되었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그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지만, 노변의 피크닉은 달랐다. 주인공 레드릭의 행적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샌가 스토커 : 섀도 오브 체르노빌의 필드에서 공포에 떨며 필드를 빌빌 거리던 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고, 원작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원작을 재밌게 읽어서 게임 스토커2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는데(이전까지는 관심이 없던 수준), 과연 스토커2는 언제 나올까.

 

트레일러를 보면 분위기 재현은 잘한 것 같은데, 몇가지 불안한 점 또한 눈에 띈다.

 

이대로 나오면 그야말로 물고 빠는 놈만 물고 빠는 게임이 될 것 같지만, 애초에 대중성을 노리고 만든 게임은 아니니 출시만 하면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