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있어서 스토리가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없는 게임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문학이 사랑을 받는 것처럼,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어떤 이야기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스토리라는 것은 플레이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고, 대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면 쓸데없는 헛소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임이 스토리를 갖추게 된 과정
게임과 스토리의 만남은 플레이어와 컴퓨터가 텍스트를 통해 대화를 하는 형태로 시작했다. 그 선구자격으로 Zork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는 컴퓨터가 광경을 설명하고 이것에 대해 플레이어가 행동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그 결과로 일어난 상황을 다시 설명하는, 인공지능 연구의 일환으로 생겨난 게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드라마적인 요소가 들어가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기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애플2로 발매된 미스테리 하우스나 트랜실베니아 등을 들 수 있으며, 머지않아 어드벤쳐 게임으로서 장르를 확립하게 된다.
한때 어드벤쳐 게임은 미국과 일본의 메인스트림이었지만, 인터페이스, 낡은 게임 방식 등 여러가지 이유로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에서는 위저드리, 울티마라는 RPG가 나오게 되고, 이에 자극을 받아 RPG에 스토리적인 요소를 담으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일본의 경우 드래곤 퀘스트(86')가 바로 그것이다.
드래곤 퀘스트 발매 후 파이널 판타지(87')가 발매되었는데, DQ와의 차이점은 스토리성에 좀 더 집중했다는 점이었다. 개발자인 사카구치 히로노부(일명 콧털 아저씨)씨는 애니메이션 각본가인 테라다 켄지씨에게 "게임으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해보고 싶다"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후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FF4(91')로 완전히 드라마성에 주안을 둔 제작법을 택해, 스토리 주도적이라는 JPRG 특징을 다지게 된다.
이후 RPG는 어드벤쳐 게임의 자리를 빼앗고, 스토리성 게임의 대명사로 발전한다. 후술하겠지만, 게임에 스토리라는 개념을 넣은 것은 좋았지만, 게임의 재미보다 연출과 스토리에 집착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연출과 스토리를 강화함에 따라 실제 플레이가 손을 놓고 화면만 바라보는 상황이 발생함에 따라, 플레이와 플레이어, 플레이어와 게임 속 주인공 간의 괴리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게임계에서 RPG는 한동안 메인 스트림을 차지했으나,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과거의 2d 어드벤쳐가 3d 어드벤쳐로 예토전생하기도 했다. 그 선구자는 "어둠 속에 나홀로(얼론 인 더 다크)"라고 할 수 있다. 어둠 속에 나홀로 1탄 발매 후 일본에서는 그 유명한 바이오 하자드가 발매된다. 바이오 하자드는 공포영화의 작법과 영화적인 연출을 결합하여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된다.
현재는 이상할 정도로 까이기만 하는 코지마 히데오의 작품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발매됐었는데, 폴리스너츠나 메탈기어 솔리드를 들 수 있다. 코지마 히데오는 그때부터 현재까지 일관적으로 영화적 표현과 게임의 융합에 몰두해 왔는데, 메탈기어 솔리드1에서 큰 열매를 맺게 된다. 이는 스토리라는 큰 틀과, 잠입액션의 디테일이 절묘히 융합된 좋은 예였다.(지금에 와서는 눈이 썩는 그래픽에, 당시 기준으로도 적병들의 인공지능이 멍청하긴 했지만 말이다)
또 젤다의 전설로 시작된 액션 게임과 스토리의 융합은 그 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면서, 시간의 오카리나에서는 3d로 보는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게 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개발자들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는 점차 확장되어 갔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액션성의 도입으로 인한 캐릭터와의 일체감이나, RPG와 AVG라는 식의 장르 해체, 예전에는 기술적인 한계로 시도하지 못했을 인터랙션의 추가나 분기 시스템의 도입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스토리 게임만 발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나 새로운 형태의 게임들-MMORPG처럼 스토리는 도구로 삼으면서 유저간 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둔 게임들도 있지만, 본 글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생략하도록 한다.
게임 스토리의 특징
기존의 매체들(만화, 영화, 소설 등)과 게임의 스토리 표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터랙션일 것이다. '제작 단계에서 구상된 세계나 스토리에 어떻게 하여 유저를 개입시켜나갈 것인가', 기존의 매체들에서 소비자는 지켜보는 것밖에 할수 없었다면, 게임은 유저가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게 큰 차이점이다.
게임에서의 인터랙션은 크게 나누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해진 시나리오를 유저가 따라 걷게 만드는 기법. 이 기법은 영화, 소설, 만화에서 쓰이는 기법에 가깝다. 최근의 게임 시장에서는 메인 시나리오가 존재하되, 유저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유도를 허용하는 방식이 선호된다. 대형제작사가 만들어내는 오픈월드형 게임이 그에 해당된다. 허용된 자유도 속에서의 짧은 즐거움. 결국 그것들은 시나리오에 따라오는 보너스적인 요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기법은 유저가 질릴 때까지, 또는 스스로 끝냈다고 납득할 수 있는 때까지 끝나지 않는 타입. 구체적으로 루나틱 돈이나 울티마 온라인, 켄시, 프로젝트 좀보이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게임 세계에서는 유저의 행동에 시나리오적인 제약은 그리 강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게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싸우고 싶지 않으면 싸우지 않아도 되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싫으면 왔다갔다 하지 않아도 된다. 행동목적으로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싶다', '더 좋은 아이템을 갖고 싶다'라는 등의 욕구가 생기고서, 처음으로 유저는 게임의 세계에서 행동을 하게 된다.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유저의 행동 그 자체가 스토리가 되고,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후자의 유형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전자보다 오랜 시간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저간 네트워크가 없다면 아무리 자유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유리상자 안의 디오라마 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유도가 있다 하더라도, 불현듯 닥쳐오는 현자타임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여기에 네트워크가 결합되는 순간, 상황은 일변한다.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플레이어들이 무수히 많은 우발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게임 속의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만 같은 깊은 몰입감. 네트워크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 무한히 확장되고(물론 이것도 서버종료 앞에는 장사가 없다), 무수히 많은 스토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야말로 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실감, RPG의 본질적인 재미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MMORPG를 무조건 찬양할 수만도 없는 이유가 있다. 커뮤니티의 붕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게임에도 엔딩은 존재하지만, MMORPG의 그것은 대단히 비참한 것이다. 함께 싸워온 동료의 은퇴, 현실세계에서의 바쁜 생활에 의한 접속률 저하, 사람들간의 다툼. 이런 저런 이유로 동료를 잃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온 세계를 잃는 것에 다름없는 허무감이 되어 온 몸을 엄습한다. 그 세계에서 보낸 시간만큼 상실감과 괴로움도 커진다.
(아랫짤은 인터넷에서 주운 섭종전 좆망겜들의 마지막입니다)
무엇을 위해 게임을 하는가?...스토리의 역할
플레이어는 무슨 이유로 레벨업을 하고, 사건을 해결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사건의 원인을 제거해야 할까?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인터랙션이란 디자이너와 게이머가 스토리를 서로 주고받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스토리란 플레이어와 게임 바깥쪽에 존재하면서 전의를 북돋는 모티베이션이라는 것이다.
과거 게임들의 스토리 텔링이 텍스트 위주로 흘러갔다면(폴리스너츠 같은 게임들도 있었지만), 파이날 판타지7(ps1), 메탈기어 솔리드(ps1) 즈음하여 스토리 표현을 영화같은 비쥬얼로 대체하는 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디자이너-플레이어가 "주고받는 관계"에서 플레이어가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입장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어떤 플레이어는 게임 바깥에서 영화를 감상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겠지만, 또 어떤 이는 소외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 껄끄러운 지점을 해소하기 위해 QTE를 도입한 작품들도 많지만, 개인적으론 이도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문제로 더럽게 재미가 없다.
영화의 영상미를 따라가는 게임
영화같은 게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화와 게임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왜 이런 게임이 지속적으로 나오는가 하면, 게임이 제공하는 시청각 효과는 강렬하게 유저의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매우 직관적이고 알기 쉬운 재미라서, 사람을 끌어당기기 쉽다. 이 측면에서 선배격인 영화는 어떠한가? 영화라는 장르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영상과 소리의 표현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상과 소리에 의한 임팩트는 오래가지 못한다. 한 번 본 것은 학습되어, 흥미가 식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영화는 질리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스토리=드라마의 존재라고 본다. 매 작품마다 주제를 바꾸며 인간 감정의 기복을 영상으로 표현함에 따라, 시청자들은 깊은 감동과 재미를 얻을 수 있다. 현세대의 게임들은 영화의 장점을 흡수하여, 플레이어들에게도 영화와 같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영화와 차별화할 수 있는 장르로서 확립된 점은 무엇인지, 소비재로서 영화만큼 완성된 단계에 있는가 고민해봤을때 아직까지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감독 지망생, 소설가 지망생이 쓴 듯한 이야기가 게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거나(가끔은 일부 소비자들, 평론가들, 제작자들 중에 영화나 문학에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영화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뭣도 아닌 애매한 무언가가 되버린다거나...
게임은 재밌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은 재밌어야 된다. 게임은 퀴즈가 아니다. 정해진 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험문제가 아니다. 플레이의 과정이 즐겁지 않으면 게임을 하는 의미가 없다. 단지 달성감을 얻고 싶은거라면 게임보다는 등산쪽이 더 좋을 것이다.
게임이 끝났을 때의 충족감은 재미있었다는 결과의 반영이다. 엔딩을 보고 난 후, 충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재밌는 게임=좋은 게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요즘은 게임으로써의 재미보다 스토리=메세지에 지나치게 집중한 게임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결국 장르적인 재미를 스스로 포기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플레이어들은 아까운 시간과 돈을 그런 것에 소비하지 말고, 다른 취미에 쏟던가, 다른 게임을 하는게 좋을 것이다. 어차피 할 게임들은 넘치니까.
요는 게임에 스토리를 결합하려면 잘 만들되, 그것에 천착하여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를 놓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게임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플레이어들의 나이가 변함에 따라 게임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고, 발전해가고 있다. 장르가 달라도 기본적으로는 게임과 디스플레이&컨트롤러가 존재하며, 플레이어는 이것들을 통해서 인터랙션을 즐긴다.
영상과 소리, 그리고 조작. 이 기본적인 틀이 게임의 표현방법이라면 이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재미있는 규칙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포인트가 아닐까. 그리고 영상과 소리를 사용한 현장감의 재현은, 게임을 영화와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엔터테인먼트 장르로 확립시킬 가능성을 숨기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최근 VR의 등장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본다. 물론 태생적인 한계(장착을 해야 한다는 점, 장르에 한계가 있다는 점 등)때문에 기존의 게임 표현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개발자들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미래가 그려진다.
일개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바라는 점은 영화나 소설에 열등감이 느껴지는 게임들 말고, 게임만의 문법으로 인간감정에 대한 "드라마"를 담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서, 장르로서 확립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사실 그런 게임들이 이미 있는 것 같지만
'게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션 로그라이트, 마나 스파크 (0) | 2020.08.15 |
---|---|
에디스 핀치의 저주받은 시야각 (0) | 2020.08.08 |
7DRL, 폴리봇-7 (0) | 2020.07.21 |
언홀리 하이츠(메종 드 마왕) 팁 (0) | 2020.06.21 |
[펌] 스팀 판매 중지 게임 리스트 (0) | 2020.06.04 |